체육시간에 공을 가지고 배구를 연습할 때, 이반의 상대가 된 짐이 공을 던지며 물었다.
“오늘 스쿨버스에 안 타고 따로 왔더라? 배신자? 너희 아빠 다시 직장이라도 구했냐?”
“.......몰라.”
이반은 공을 품 안에 받으며 짤막하게 답했다. 이반은 공을 다시 짐 족으로 던졌다. 짐은 공을 바닥에 여러 번 튕기며 다시 물었다.
“왠지 저번에 본 너희 아빠는 뭐랄까, 파티에 미친 사람 같았는데 말이야. 우리 아빠가 늦게 들어올 때 나는 냄새가 있는데, 너희 아빠는 계속 나더라.”
짐은 다시 이반에게 공을 던졌다. 아까보다 빠르게 내려온 공이 이반의 품에 안겼을 때, 이반은 살짝 고통을 느꼈다. 이반은 공을 세게 누르며 말했다.
“늘 그러시진 않아. 그리고 이제 안 그럴 거야.”
이반은 짐이 던졌던 속력 비슷하게 공을 던졌다. 짐은 힘겹게 공을 받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그건 모르는거지. 넌 뉴스도 안 보니, 이반? 집에서 늘 게임만 해?”
“.......시끄러워, 짐. 공이나 던져.”
그때, 체육선생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패스시간이 끝났다. 짐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준 채 선생 앞으로 달려갔다. 이반은 그런 짐의 등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체육시간이 끝나고서도 짐은 이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운동장에서 짐은 공을 차면서 이반에게 외쳤다.
“그러고보니 살짝 너희 아빠, 살짝 얼굴로 달라보이더라.”
이반은 눈을 크게 뜨며 짐을 쳐다봤다. 이반의 관심을 끌자 짐은 더 신이 났다. 그는 다른 아이들 속에서 오로지 이반만 보인다는 듯이 계속 말을 꺼냈다.
“너희 아빠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설마 양아빠는 아니지? 이혼은 뭐, 흔하게도 하니까! 나도 겪었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이반. 하하하!”
그의 짖궂은 웃음에 다른 아이들도 동참하며 따라했다. 이반은 홧김에 자기 쪽으로 온 공을 딴 곳으로 차버렸다.
“닥쳐, 제임스! 우리 누나가 그랬어! 우리집은 이제 행복할거라고. 부모님 이혼한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해! 마약쟁이 집안이.”
뜻하지 않은 공격에 제임스는 성큼성큼 이반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네 누나만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꼬맹이가? 마마보이 같은 애가 바로 너잖아! 이반! 네 이사벨 누나. 그 누나가 없으면 넌 그냥 멍청한 애라고. 찌질하고, 소심하고! 아! 저번에 좋아하는 애에게 제대로 고백도 못....!”
제임스는 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운동장 위에서 이반과 주먹다툼을 이어나갔다. 그 둘을 말리기 위해 먼저 달려온 것은 이사벨이 아닌 레일라였다. 레일라는 테니스채를 내려놓고는 이반을 제임스에게 떼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 싸움은 이미 난장판이 되었고, 레일라는 주먹을 피할 만큼 날렵하지 못했다.
이사벨은 레일라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일라의 한쪽 볼도 부어있었다.
“그래서 널 부른 거란다. 이사벨. 제임스에게도 너에 관한 오해를 직접 풀어주는게 맞을 것 같구나. 또 레일라하고 친구이니 동생의 사과를 받아줄 수 있게 해주렴.”
“네, 선생님.”
이사벨은 풀 죽은 소리로 오스왈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도 제임스와 이사벨, 남매의 부모님이 교무실로 왔다. 그 다음은 어른의 일이었다. 어른들, 특히 남매의 어머니는 연신 허리를 숙여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레일라는 그 집안의 변호사가 와서 소액의 합의금을 거론할지도 모른다며 끝을 냈고, 제임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제임스는 보모가 와서 그를 데려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안 이반은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건은 크게 번지지 않은 채 끝이 났다. 하지만 이반은 여전히 시무룩했고, 이사벨은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차에 내린 뒤 이반과 따로 시간을 가지겠다면서 방으로 향했다. 이사벨은 방으로 들어가며 이반에게 한 마디 외쳤다.
“왜 싸우고 난리야! 너는!”
“아니, 왜 그러니. 이사벨. 동생이 슬퍼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나쁜 누나야. 동생이 널 위해서 싸운 것 아니니, 비록 잘못하기는 했지만. 얼른 방으로 가렴, 이사벨.”
여전히 이반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사벨은 그런 동생의 등을 노려보며 콧방귀를 세게 뀌었다.
“몰라! 정말!”
어머니는 이반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괜찮아, 이반. 다 그럴 수 있단다. 가끔 화가 날 수 있단다. 하지만 그럴 때 주먹으로 사람을 때리면 정말 나쁜 거란다. 설령 그 사람이 나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어머니는 이반을 침대에 앉혀놓고 이런 저런 말을 했지만, 이반은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실망과 분노가 가득 담긴 이사벨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녁식사 때 마주친 이사벨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사벨은 이반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 이사벨이 말끔해진 아버지를 쳐다보자 환하게 웃어보였다.
학교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이반을 위로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단다, 이반. 남자애라면 그런 일도 겪고 그러는 거지. 나도 한창 학교 다닐 때에는 애들과 싸우고 그랬단다. 하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학교에 정말 많이 오곤 했는데 말이야! 하하하!”
“정말요? 아빠? 아빠는 왠지 안 그럴 것 같은데!”
“여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만 해요. 교육에 좋은 얘기도 아닌데.”
이반은 살짝 고개를 들어 누나를 쳐다봤다. 오로지 그만을 생각하고 아껴주던 누나, 이사벨이 그와 눈을 마주치자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도 애들과 싸운 것은 정말 잘못이라고요. 게다가 레일라도.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이반은 더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넓은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위로가 담긴 손길이었지만 전혀 이반의 가슴에 와닿지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이반은 제임스의 말이 떠올랐다. ‘너희 아빠! 어딘가 좀 다른 것 같던데. 양아빠 아니야?’ 이반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봤다. 평소에 아버지의 얼굴과 어딘가가 살짝 달라보였다.
‘입술이 저렇게 활기가 돌았던가? 머리색이 이렇게 밝은 갈색이었던가? 눈동자 색도 어딘가 좀 달라보여. 손도 이렇게 두껍지 않았던 것 같기도. 정말 우리 아빠가 맞을까?’
이반은 아버지가 자신의 볼을 꼬집을 때까지 공상에 빠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 엄마도 그대로인데.’ 이반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사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사벨은 그를 노려보고는 바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자! 우리 기도합시다.”
아버지의 식사 기도문이 울려퍼졌다. 우리 주 예수 어쩌고 저쩌고. 이반은 울적한 기분이 들며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누나가 날 다시 쳐다보게 해주세요. 하느님. 예수님. 보고 계신다면, 누나가 절 다시 좋아하게 해주세요. 아빠도, 엄마도 솔직히 전 잘 모르겠어요. 누나가 내 전부였는걸요. 누나는 지금이 좋다지만 전 잘 모르겠어요.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고. 우리집이 아닌 것 같아요. 소원을 빈 뒤부터......’
이반은 숲과 온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은 마녀, 벨라도 떠올랐다.
‘차라리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일어나면 다시 숲이었으면. 내 소원은 이게 아니었는데, 내가 원하는 소원은 정말 이게.......’
이반은 실눈을 떠 이사벨을 쳐다봤다. 이사벨은 몸을 아버지 쪽으로 틀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반은 그 모습을 보고 아까와는 비교도 못할 참담함을 느꼈다.
‘소원을 다시 빌었으면 좋겠어.’
이반은 다시 눈을 뜨면 숲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멋지고 어색한 아버지의 기도문은 계속 들려왔다. 이사벨은 기도문의 끝마다 조용히 ‘아멘’을 되뇌였다. 이반의 기분은 더 울적해졌다.
긴 식사기도 시간이 끝나고,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창가 너머를 쳐다봤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많이 부네. 저 숲이 흔들릴 정도라니.”
“정말요?”
이사벨은 창가 가까이 다가가 숲을 지켜봤다. 이반도 고개를 빼꼼 내밀어 창가 너머를 쳐다봤다. 바깥, 거친 바람으로 흔들리는 숲의 소리가 들렸다. 나무들 앞에는 여우 한 마리가 서성거렸다. 여우는 남매와 눈을 마주치는 느낌이 들었다. 여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두 남매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바람이 그치고, 숲이 고요해질 때까지.
스토리텔러 -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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