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너는 그런 집안에서 살고 싶다 이 말이구나. 그렇지? 이반?”
“맞아! 솔리에르! 더는 아프고, 상처만 나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아. 누나도 이제 그만 울었으면 좋겠어. 아버지에게 맞은 상처가 없었으면 좋겠고. 늘 다 나았다 싶으면 또 때리시거든.”
다 말을 하고 나니 문득 나는 고개를 숙이게 됐다. 기쁘지 않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흰 사자, 솔리에르는 갑자기 나무에서 내게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는 마치 포옹을 해주는 듯 내게 몸을 기대었다.
“울어도 좋다, 이반. 그동안 억눌렀던 슬픔을 다 내게 토해내고 가라.”
내 마음을 잘 알아차린 솔리에르의 말에 나는 그 어느 때부터 미친듯이 울었다. 나의 울음은 마치 짐승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거칠게 포효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나는 슬펐고, 또 억울했으며 짓눌려있었던 듯 했다.
태어나자마자 슬픔을 겪어야 했던 내 마음을, 태어나서 처음 대화해본 사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사자는 친근한 친구처럼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앞발과 발톱, 날카로운 송곳니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저 인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날 감싸안는 것은 인간일지도 모르겠단 상상이 들었다.
내가 다 울고 그의 품에서 살짝 벗어났을 때, 솔리에르는 놀랍게도 사자가 아니라 화관을 쓴 인간이 되어있었다. 나는 살짝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봤지만, 솔리에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말을 하고, 네 소원을 들어주는 사자였는데 무언들 못 하겠느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전혀 이상할게 없었다. 그는 내 친구였고, 지지자였다. 솔리에르는 나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나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걸어갔다.
솔리에르가 앉아있던 거대한 나무 뒤, 그곳에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나무뿌리들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문과 같았다. 솔리에르는 나를 지긋이 쳐다봤다. 마치 지켜보라는 뜻이었다. 그는 나무뿌리들 앞으로 다가가 긴 숨을 불어넣었다. 그의 숨은 마법의 주문처럼 신비롭게 뿌리들을 파고들었다. 앞뒤로 뒤엉킨 뿌리들은 뱀이 된 것처럼 부드럽게 밖으로 움직였다.
“이게 뭐야? 솔리에르?”
“이곳으로 쭉 걸어가렴, 이반.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걸어가면 그곳에는 네가 원했던 가족이 있을 거란다.”
“뒤는 왜 돌아보지마?”
“네 꿈만 바라보고 가란 뜻이란다. 지금 네가 도착할 곳은 네가 원하고 꿈꾸던 곳이니 말이다.”
“그럼 솔리에르는 이제 다시는 못 만나는 거야?”
“네가 원하는 순간이면 난 언제든 볼 수 있을 거란다. 거리에서도, 집에서도. 지금은 앞만 보고 가야 할 때란다, 네가 원하는 그 꿈으로.”
“고마워, 솔리에르. 정말 내 친구는 너뿐이야.”
“잘 가라. 나의 친구, 이반.”
솔리에르는 내 손을 떼고 날 깊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다. 나는 그를 믿는 만큼 용기를 내어 구덩이 안으로 걸어갔다. 안은 컴컴했지만 전혀 두럽지 않았다. 뒤로 비치는 햇살과 솔리에르의 그림자가 나무 뿌리로 뒤덮였지만, 나는 꿋꿋이 그의 말마따나 뒤를 보지 않고 전진했다. 마을 풍경이 보일 때까지 난 믿음을 갖고 나무구덩이 안을 걸었다.
스토리텔러 -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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