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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의 숲 #26. 말하는 여우







“생각보다 금방 깼군.”


이반과 이사벨을 만난 것에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아보고 있을 때 안개를 뚫고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긴장한 얼굴로 서로를 보다가 가까이 붙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나?”


안개를 가르고 나타난 것은 탐스럽게 윤기가 흐르는 털을 가진 붉은 여우였다. 붉은 여우는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와 물었다. 말하는 여우라니, 이상한 일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경계심이 들었다. 나는 여우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나며 이반과 이사벨의 손을 잡아당겼다. 뒤로 물러나면 물러난 만큼 따라오던 여우는 자리에 서서 우리 뒤에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어 붉은 노을과 보라색 하늘이 안개와 어우러지는 호수의 전경은 감탄을 불러왔지만 난 그 광경을 볼 정신이 없었다. 가뜩이나 이상한 것들을 보고 정신을 차린 뒤라 머리가 복잡한데 풍경이 눈에 들어올까.


“숲을 온전히 벗어나려면 길이 아닌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이 아니라고? 우리가 들어온 길로 돌아가는 건 안 돼?”


“그 길은 대가를 지불 해야지만 건널 수 있는 길이다. 너희들은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아서 출구로 갈 수 없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야 해?”


대가라니, 아무것도 받지 않았는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니 억울했다. 억울한 마음에 여우를 향해 따지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던 이사벨이 여우에게 한발 다가가 물었다. 가만히 있는 게 안전할 텐데 가만 보면 얘도 겁이 없다. 그래도 일단 이사벨을 다시 잡아당겨 뒤에 세우고 여우를 노려보았다. 쉽게 알려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 우리의 대치가 길어질 무렵, 이번에는 이반이 나서서 여우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가는 길, 알려주면 안 될까?”


이반은 정중한 어투로 부탁했다. 어린아이의 부탁이니 잘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우의 반응을 자세히 살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여우는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물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호수, 여기로 뛰어들어”


여우가 가리킨 호수는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잔잔히 물결이 일고 있었다. 호수로 들어가라니 정말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 숲의 모든 게 이상하기는 했지만, 호수로 들어가라는 말은 정말 이해가 안 갔다. 그대로 들어가면 목숨이 위험해질 것 같은 깊은 호수를 보다가 이반과 이사벨을 돌아보았다. 둘도 당황스러운지 표정을 굳힌 채 여우와 호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우리의 망설임을 읽었는지 여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길은 비상구 같은 길이다. 지금 너희들이 처한 상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이 길뿐이다. 여기로 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군.”


지금까지의 일들을 조합해 생각해볼 때 소원을 빌면 대가가 자동으로 지불되는 것이 이 숲의 규칙인 듯싶다. 그럼 지금 여우의 말은 우리가 아직 소원을 빌지 않았으니 대가를 지불할 필요 없이 숲을 나갈 수 있고 그 방법이 호수로 들어가는 거란 말이지. 얼추 돌아가는 일들이 이해가 가는 듯해 조금은 차분한 사고가 가능해졌다. 내가 본 것들이 둘이 소원을 빌면 일어날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안된다. 진정한 불행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이사벨, 우리 호수로 들어가자.”


“뭐? 하지만 레일라, 너무 위험해! 게다가 이반은 아직 수영을 못하는걸?”


“우리가 잡아주면 돼!”


당장 나가자.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무작정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나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듯한 둘이었지만 그렇다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지도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이 한 뼘씩 차올라왔다. 물은 우리를 반기지 않는 것처럼 차가웠다. 호수는 우리가 걸어나가는 소리만 첨벙첨벙 울릴 뿐 고요했다. 뒤돌아보니 여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누나 무서워!”


이반의 가슴께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이사벨과 나는 이반의 손을 잡고 더 깊은 곳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물을 가르고 들어갈수록 이상하게 불안하던 마음은 가라앉고 차갑던 수온도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 혼자만 느낀 것도 아닌지 이반과 이사벨의 표정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해져 있었다.


이젠 아무리 노력해도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곳으로 와버렸다.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했으니 도박 같아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최대한 숨을 참고 호수 아래로 잠겨 들었다.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깊이 더 깊이 빠져들 뿐이다.


숨가파 오는 건가? 아니면 그냥 느낌일 뿐인가? 알 수는 없다. 구분 짓는 일은 늘 어렵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아갔다. 어딘가 있을 출구를 향해.

기분 탓인가,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는 것 같다.





스토리텔러 -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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