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수풀 밑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슬 무게에 휘어진 풀잎과 점점 부스러지는 고목의 뿌리 사이로 작은 생명이 기어 다녔다. 이슬이 말라갈 즈음엔 새무리가 날아와 지친 날개를 접고 따스함을 즐기며 지저귀었다. 그러다 무언가 덤불 사이에서
바스락,
새들은 놀라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덤불 사이 얼굴을 내민 이는 숲지기 여우 에스티안이었다. 조막만 한 발로 자연스레 수풀을 해치고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숲의 고요함은 사라졌다. 다양한 새들이 오고 가며, 들짐승들도 뛰어다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버리고 간 일회용 컵. 에스티안은 자신이 숲의 경계까지 왔음을 알아차렸다.
경계 그 너머에는 익숙한 흙내와 풋내가 지워지고 인공적인 시멘트 냄새가 났다. 도로 위에는 인간들이 지나다니고 에스티안은 그들을 흘겨보며 경계 근처에 숨어들었다. 인간들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다 피운 담배꽁초, 빈 음료수 캔, 갖가지 종이. 그것들은 짓밟히고 채이며 길가를 나뒹굴었다. 그러다 구겨진 전단지 하나가 에스티안 앞으로 굴러들어왔다. 그는 전단지를 물어다 땅을 파고 그 속에 묻었다. 인간의 손때가 묻고 본모습은 잃었지만, 그것은 숲의 산물이고 나무였으며, 숲이었다.
“욕심은 버리지 못하고 늘 망각하며 사는 것들. 은혜로운 숲을 여전히 불태우며 사는군. 벨라님이 안 계셨다면 온갖 재앙이 저 어리석은 이들을 뒤엎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아쉬워.”
에스티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숲을 지키며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을 지켜봐 왔으나 인간은 그에게 여러모로 혐오스러운 종이었다. 벨라만 아니었다면 에스티안은 진작 인간들을 불행하게 하는 일에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벨라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에스티안은 의아해했지만, 그녀는 명확하게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유도 모른 채로 인간을 지켜봐야 하는 에스티안은 늘 불만스럽게 그들을 지켜보고, 평하며, 판단했다.
탐욕스러운 인간을 한참 지켜보다 피로감이 쌓인 에스티안은 자리를 옮겼다. 졸졸대는 개울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개울물이 흐르는 경계 너머에는 민가들이 소소하게 모여있는 마을이 있었다. 푸릇푸릇한 풀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며, 경계를 넘어가도 흙냄새가 끊기지 않았다. 동물들이 숲을 나가면 주로 향하는 곳이었다. 에스티안은 경계선 제일 안쪽에 자리를 틀며 마을에 난 길을 지긋이 지켜봤다.
‘이런 곳이 제일 위험하지.’
동물들이 왕래가 잦다는 것은 곧 숲과 마을의 경계가 가깝고도 흐릿하다는 뜻이었다. 도시는 그럴 일이 적었지만, 드물게 인간이 숲으로 들어오려 하면 열에 아홉은 다 이곳에서 벌어졌었다. 오늘도 숲으로 들어오려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에스티안은 몸을 일으키고 그림자들을 살폈다. 작은 체구에 가볍고 불안한 걸음걸이. 인간 아이들이었다. 어른 인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욕심이 적고, 순수한 아이들이 동물을 쫓다가 종종 숲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에스티안은 근처에 놔둔 주머니를 갖고 왔다. 주머니에는 빛에 따라 반짝이는 가루들이 담겨 있었다. 에스티안은 아이들 앞에 주머니에 담긴 가루를 살짝 흩뿌렸다.
숲의 경계에 뿌려진 가루는 흙에 닿자 산화되면서 몽실몽실 안개가 되어 낮게 깔려갔다. 에스티안은 안개 사이로 걸어가면서 아이들을 살폈다. 아이들은 불안에 떨면서 안개 속을 휘저었다. 에스티안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봤다. 불안해 하는 아이, 우는 아이,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길이나 조금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가거라, 괜히 숲에 들어와서 어지럽히지 말고. 적당히 무서움을 느끼다가 떠나.”
스토리텔러 - 박우진,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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